문화

마음이 돌아가는 자리…박지은, 옻칠로 그린 ‘텅에’

 어린 새가 몸을 기대는 둥지는 작고 연약하지만, 생명을 품는 가장 단단한 공간이기도 하다. 옻칠 화가 박지은은 제주 방언으로 둥지를 뜻하는 ‘텅에’에서 현대인의 보금자리를 떠올린다. 돌아가고 싶은 곳, 잠시 머물고 싶은 곳, 혹은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상상의 장소가 그의 화면 위에 풍경으로 펼쳐진다.

 

갤러리진선은 오는 10월 7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진선에서 박지은 개인전 ‘텅에(Nest)’를 연다. 이번 전시는 박 작가가 오랜 시간 탐구해온 옻칠 작업을 바탕으로, 안식처와 기억, 보호의 감각을 시각화한 풍경 작품 25점을 소개한다.

 

전시 제목 ‘텅에’는 어린 새의 보금자리인 둥지를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작가는 이 단어를 자연 속 둥지에 머물게 하지 않고,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적 피난처로 확장한다. 빠르게 변하는 일상 속에서 어디에 기대고, 무엇을 집이라 느끼는지에 대한 질문이 작품 전반에 흐른다.

 

박지은의 풍경은 특정 장소를 사실적으로 옮긴 장면이라기보다 마음속에 남은 장소의 이미지에 가깝다. 작품 속 공간은 한때 머물렀던 곳일 수도 있고, 언젠가 도착하고 싶은 곳일 수도 있다. 현실과 기억, 상상이 겹쳐진 풍경은 관람자에게 저마다의 ‘텅에’를 떠올리게 한다.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붕과 기와는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지붕은 외부의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구조물이자, 그 아래 머무는 이들의 기억과 감정이 쌓이는 자리다. 박 작가는 기와의 형태를 통해 보호받는 감각, 안으로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을 은유한다.

 

재료 역시 전시의 의미를 강화한다. 박지은은 옻칠 기법과 함께 계란 껍질 등 자연 소재를 작품에 활용한다. 난각은 생명을 감싸고 보호하는 껍질이라는 점에서 둥지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깨지기 쉬우면서도 생명을 지키는 난각의 물성은, 불안정하지만 소중한 인간의 안식처를 떠올리게 한다.

 

옻칠은 작품에 깊고 단단한 시간성을 부여한다. 여러 번 칠하고 말리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옻칠의 표면은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와는 다른 밀도를 지닌다. 그 위에 더해진 난각과 풍경의 형상은 오래된 기억처럼 화면에 가라앉고, 동시에 은은한 빛을 품는다.

박지은은 동덕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지필묵을 중심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2008년부터 옻칠 기법을 본격적으로 작품에 접목하며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넓혀왔다. 현재 전북 완주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으며, 이번 전시는 작가의 25번째 개인전이다.

 

박지은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등에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 ‘텅에’는 한 사람의 기억 속 풍경을 넘어, 각자가 품고 있는 보금자리의 감각을 조용히 돌아보게 하는 자리다. 지붕과 껍질, 옻칠의 깊은 표면을 따라가다 보면 관람자는 자신만의 안전한 자리, 마음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둥지를 마주하게 된다.

 

고려아연, 8370억원 손배소 승소…영풍은 항소

 고려아연이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영풍 측이 제기한 약 837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법원은 고려아연 이사들이 자기주식을 공개매수하는 과정에서 법령과 정관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려아연은 이번 판결로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정당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밝혔지만, 영풍과 MBK파트너스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는 22일 영풍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비롯한 이사 10명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영풍은 고려아연 이사회가 내린 결정으로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며 약 8370억원의 배상을 청구했지만, 재판부는 해당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사들의 경영상 판단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만한 위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재판부는 고려아연 이사들의 자기주식 취득 결정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위반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사는 회사 경영에 관한 재량권을 가지며, 법령을 위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해 의사결정을 내렸다면 그 결과만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경영상 판단의 내용이 현저하게 불합리하지 않은 경우에는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법원은 고려아연의 자기주식 공개매수 결정이 이 같은 경영 판단의 범위 안에 있다고 봤다. 당시 고려아연 이사들은 영풍 측의 공개매수를 회사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기주식 취득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 과정에서 이사들이 관련 법령에 따른 절차와 제한을 준수하고 외부 법률 자문 등을 검토했으며, 일정 수준의 할증 가격과 자금조달 방안을 고려해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판단이 현저하게 불합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결론이다. 자기주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상법이나 회사 정관을 위반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상법 제462조 제1항에 규정된 배당가능이익과 관련해서도 영풍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배당가능이익은 회사가 주주에게 이익을 배당할 수 있는 한도를 의미하며, 자기주식을 취득할 때도 해당 한도 내에서 매입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이 규정이 자기주식 취득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의 총규모를 제한하는 것이지, 취득 자금이 어떤 회계 항목에서 마련됐는지를 기준으로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규정은 아니라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자기주식 취득에 특정 재원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법령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 회사 정관에 중간배당을 할 때 특정 목적의 임의준비금을 재원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이 있다는 점도 쟁점이 됐다. 다만 재판부는 해당 규정을 자기주식 취득에 그대로 적용하거나 유추해 적용할 수는 없다고 봤다. 따라서 해당 재원을 자기주식 매입에 활용한 것이 정관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이번 소송은 영풍이 2024년 11월 최 회장 등 고려아연 이사 10명을 상대로 제기했다. 영풍은 이사들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아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주주대표소송은 회사가 이사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책임을 추궁하는 절차다. 소송에서 주주 측이 승소하더라도 배상금은 소송을 제기한 주주 개인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돌아간다.영풍이 문제 삼은 것은 고려아연 이사회의 자기주식 공개매수였다. 영풍 측은 주당 약 56만원 수준이던 고려아연 주식을 89만원에 공개매수해 총 204만30주의 자기주식을 취득한 결정이 회사에 손해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한 만큼 회사의 자산에 손실이 발생했고, 이를 결정한 이사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최대주주로, 양측은 경영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이어왔다. 그러나 법원은 공개매수 가격과 자금조달 방안 등을 검토한 이사회의 판단이 현저히 불합리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영풍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고려아연은 이날 별도로 진행된 한화 지분 매각 관련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고려아연은 두 건의 판결을 통해 자기주식 공개매수와 한화 지분 매각을 둘러싼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입장이다. 회사 측 관계자는 영풍과 MBK가 적대적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방해하고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소송을 반복하고 있다며 이 같은 소송 제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영풍과 MBK파트너스는 법원 판결에 유감을 표하고 항소 방침을 밝혔다. 양측은 상급심에서 자기주식 공개매수의 위법성과 고려아연 이사회의 선관주의의무 위반 여부를 다시 다투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이번 판결로 일단락된 듯 보였던 손해배상 분쟁은 항소심에서 다시 이어질 전망이다.이번 판결은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이사회가 내린 주요 의사결정의 적법성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법원은 자기주식 취득 결정 당시 이사들이 관련 법령과 절차를 검토하고 회사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점 등을 고려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영풍·MBK 측이 항소를 예고한 만큼, 자기주식 공개매수의 적법성과 이사들의 경영 판단에 대한 책임 범위는 상급심에서 다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