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안경점이야 미술관이야? 성수동 홀린 '공간의 마법'

 서울 성수동의 거리를 걷다 보면 안경점인지 현대미술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웅장한 건물들이 시선을 붙잡는다. 제품을 빽빽하게 진열해 구매를 종용하던 과거의 상업 매장들과 달리, 최근의 브랜드들은 가장 노른자위 공간을 거대한 조형물이나 서점으로 비워두는 파격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선두에는 10년 전부터 매장을 실험적인 전시 공간으로 정의해온 젠틀몬스터가 있다. 이들은 2025년 완공된 사옥을 통해 상업적 효율성을 완전히 배제한 듯한 예술적 공간 구성을 선보이며, 브랜드의 철학을 도시의 풍경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젠틀몬스터의 공간 기획은 안경이라는 실용적 도구를 예술 작품의 영역으로 격상시키는 정교한 논리에 기반한다. 시각을 교정하는 안경의 본질을 시각적 자극을 주는 뮤지엄의 가치와 결합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단순한 쇼핑이 아닌 심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뮤지엄이라는 맥락 안에서 안경은 더 이상 공산품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가 담긴 오브제로 인식된다. 이러한 공간의 정의는 제품의 디자인이 다소 과감하더라도 그것을 '실험적 예술'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강력한 프레임을 형성한다.

 


공간의 파격적 재정의는 아이웨어 산업을 넘어 호스피털리티 업계로도 확산되고 있다. 부산의 럭셔리 리조트 아난티는 호텔의 심장부인 1층 로비에 수익성이 낮은 대형 서점을 배치하는 결단을 내렸다. 보통의 호텔들이 명품 매장이나 식음료장을 배치해 매출 극대화를 노리는 것과 대조적인 행보다. 아난티는 서점이 주는 정적인 머무름을 통해 단순한 숙박 시설을 정서적 영감을 얻는 여정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곳에서 방문객은 소비자가 아닌 사색의 주체로서 공간을 향유하게 된다.

 

이러한 공간 브랜딩의 핵심은 소비자가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게 만드는 '여백의 미학'에 있다. 브랜드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입하는 대신, 낯선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소비자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구조다. 안경점에서 거대한 뱃머리를 마주하거나 호텔에서 웅장한 서가를 만날 때, 대중은 브랜드를 하나의 해석해야 할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정서적 유대감은 단순한 제품 구매보다 훨씬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는 브랜드 충성도로 이어진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기업 입장에서 결코 효율적인 선택이 아니다. 평당 매출을 따지는 자본의 논리로는 설명하기 힘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숫자로 증명하기 어려운 감성적 가치를 믿고 공간을 비워두는 브랜드만이 소비자의 기억 속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소비자는 호텔을 떠날 때 침구의 촉감보다 그 공간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느끼게 했는지를 더 깊게 기억한다. 결국 성공적인 공간 브랜딩은 소비자를 메시지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닌, 취향의 주인공으로 대우하는 데서 시작된다.

 

결국 미래의 오프라인 매장은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브랜드의 세계관을 체험하는 성소가 될 전망이다. 젠틀몬스터와 아난티가 보여준 행보는 상업 공간이 예술 및 문화와 결합했을 때 발생하는 폭발적인 시너지를 증명했다. 소비자가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스스로 의미를 완성할 수 있는 단단한 여백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에 오프라인 공간이 살아남는 유일한 해법이다. 이제 브랜드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물건을 진열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물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려아연, 8370억원 손배소 승소…영풍은 항소

 고려아연이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영풍 측이 제기한 약 837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법원은 고려아연 이사들이 자기주식을 공개매수하는 과정에서 법령과 정관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려아연은 이번 판결로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정당했다는 점이 확인됐다고 밝혔지만, 영풍과 MBK파트너스는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는 22일 영풍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비롯한 이사 10명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영풍은 고려아연 이사회가 내린 결정으로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다며 약 8370억원의 배상을 청구했지만, 재판부는 해당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사들의 경영상 판단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만한 위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재판부는 고려아연 이사들의 자기주식 취득 결정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와 충실의무를 위반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사는 회사 경영에 관한 재량권을 가지며, 법령을 위반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합리적으로 판단해 의사결정을 내렸다면 그 결과만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경영상 판단의 내용이 현저하게 불합리하지 않은 경우에는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법원은 고려아연의 자기주식 공개매수 결정이 이 같은 경영 판단의 범위 안에 있다고 봤다. 당시 고려아연 이사들은 영풍 측의 공개매수를 회사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기주식 취득을 결정했다. 재판부는 이 과정에서 이사들이 관련 법령에 따른 절차와 제한을 준수하고 외부 법률 자문 등을 검토했으며, 일정 수준의 할증 가격과 자금조달 방안을 고려해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판단이 현저하게 불합리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결론이다. 자기주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상법이나 회사 정관을 위반했다는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상법 제462조 제1항에 규정된 배당가능이익과 관련해서도 영풍 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배당가능이익은 회사가 주주에게 이익을 배당할 수 있는 한도를 의미하며, 자기주식을 취득할 때도 해당 한도 내에서 매입해야 한다. 그러나 법원은 이 규정이 자기주식 취득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의 총규모를 제한하는 것이지, 취득 자금이 어떤 회계 항목에서 마련됐는지를 기준으로 위법 여부를 판단하는 규정은 아니라고 설명했다.이에 따라 자기주식 취득에 특정 재원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법령을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 회사 정관에 중간배당을 할 때 특정 목적의 임의준비금을 재원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이 있다는 점도 쟁점이 됐다. 다만 재판부는 해당 규정을 자기주식 취득에 그대로 적용하거나 유추해 적용할 수는 없다고 봤다. 따라서 해당 재원을 자기주식 매입에 활용한 것이 정관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밝혔다.이번 소송은 영풍이 2024년 11월 최 회장 등 고려아연 이사 10명을 상대로 제기했다. 영풍은 이사들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아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했다. 주주대표소송은 회사가 이사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책임을 추궁하는 절차다. 소송에서 주주 측이 승소하더라도 배상금은 소송을 제기한 주주 개인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돌아간다.영풍이 문제 삼은 것은 고려아연 이사회의 자기주식 공개매수였다. 영풍 측은 주당 약 56만원 수준이던 고려아연 주식을 89만원에 공개매수해 총 204만30주의 자기주식을 취득한 결정이 회사에 손해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한 만큼 회사의 자산에 손실이 발생했고, 이를 결정한 이사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최대주주로, 양측은 경영권을 둘러싸고 갈등을 이어왔다. 그러나 법원은 공개매수 가격과 자금조달 방안 등을 검토한 이사회의 판단이 현저히 불합리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영풍 측의 청구를 기각했다.고려아연은 이날 별도로 진행된 한화 지분 매각 관련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고려아연은 두 건의 판결을 통해 자기주식 공개매수와 한화 지분 매각을 둘러싼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정당성을 인정받았다는 입장이다. 회사 측 관계자는 영풍과 MBK가 적대적 인수합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방해하고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소송을 반복하고 있다며 이 같은 소송 제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영풍과 MBK파트너스는 법원 판결에 유감을 표하고 항소 방침을 밝혔다. 양측은 상급심에서 자기주식 공개매수의 위법성과 고려아연 이사회의 선관주의의무 위반 여부를 다시 다투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이번 판결로 일단락된 듯 보였던 손해배상 분쟁은 항소심에서 다시 이어질 전망이다.이번 판결은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이사회가 내린 주요 의사결정의 적법성을 둘러싼 법적 다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법원은 자기주식 취득 결정 당시 이사들이 관련 법령과 절차를 검토하고 회사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점 등을 고려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영풍·MBK 측이 항소를 예고한 만큼, 자기주식 공개매수의 적법성과 이사들의 경영 판단에 대한 책임 범위는 상급심에서 다시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