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모아

'머니 무브' 균열에 2030 이탈, 이재명 복합위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40%대 중반까지 추락하며 집권 초기의 강력한 주도권이 흔들리고 있다. 올해 초 반도체 호황과 코스피 6000선 돌파라는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70%에 육박하는 지지를 얻었으나, 최근 증시의 변동성 확대와 서울 아파트값 급등이 맞물리며 민심이 급격히 냉각됐다. 특히 8월 첫째 주 여론조사 결과 국정 수행에 대한 부정 평가가 50%를 넘어서는 데드크로스가 발생하면서, 정부의 정책 추진력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이번 지지율 하락의 가장 뼈아픈 대목은 핵심 지지 기반이었던 2030 세대의 이탈이다.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했던 '부동산 자산의 증시 이동' 정책이 주식 시장의 급락으로 인해 신뢰를 잃으면서, 자산 형성에 민감한 청년층의 실망감이 분노로 변했다. 여기에 주거비 부담까지 가중되자 30대 지지율은 일주일 사이에 7%포인트 이상 급락하는 등 스윙보터 계층의 지지 철회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경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던 국민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결과다.

 


정치적으로는 검찰 개혁을 둘러싼 당정의 강경 노선이 기존 지지층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수사 공백에 따른 피해자 구제 미흡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터져 나오고 있다. 특히 여성 대상 범죄에 민감한 2030 여성층 사이에서는 경찰의 수사 역량에 대한 불신과 맞물려 정부의 개혁 방향에 회의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는 단순한 야권의 공세를 넘어 정부의 도덕성과 역량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으로 번지고 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강경 발언은 흩어져 있던 보수 진영을 하나로 묶는 기폭제가 됐다. 이 대통령은 최근 사관학교 통폐합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과거 쿠데타의 책임을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에게 돌리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군 개혁의 명분으로 '내란 청산'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직접 제시하자, 야권은 즉각 대통령이 군을 갈라치기하고 있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실용주의를 표방하며 중도 확장을 꾀했던 취임 초의 모습과는 상반된 행보가 보수층의 결집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여당 내부의 상황도 이 대통령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이달 중순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성을 강조하는 강경파 지도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통령의 국정 운영 선택지는 더욱 좁아질 것으로 보인다. 당권 주자들이 앞다투어 검찰 개혁 완수 등 강경 의제를 내세우고 있어, 지지율 회복을 위해 중도층을 겨냥한 정책 선회를 시도하기가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당정 관계의 경직성이 국정 동력 약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결국 이재명 정부는 경제 악재와 진영 갈등, 여당 내분이라는 복합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처방으로는 현재의 하락세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진단하며,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쇄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부동산 시장 안정화와 증시 신뢰 회복 등 민생 현안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임기 초반의 강력한 리더십은 빠르게 소멸할 가능성이 크다. 50%대 지지율 회복을 위한 정부의 승부수가 어느 시점에 나올지 정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이순자·김건희 능가한 초대 영부인

 대한민국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동안 이순자나 김건희 등 후대 영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국적 배경과 친인척 비리에서 자유로웠던 환경 덕분에 검소하고 헌신적인 내조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과 비화들을 심층 분석해 보면, 프란체스카는 단순한 내조자를 넘어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한 '소통령'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남편인 이승만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인사권을 전횡하며 제1공화국의 몰락을 부추긴 실질적인 권력의 한 축이었다.프란체스카의 권력 행사는 남편의 인사권을 가로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비서를 좌천시키거나 장관에게 직접 인사를 통보하는 등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서슴지 않고 침범했다. 당시 외신들은 정부 관리들이 실력보다는 영부인에 대한 개인적 호의 덕분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비서진에게 이해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영부인이 경무대 내부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며 공적 시스템을 사유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인사 개입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프란체스카가 직접 장악한 '대한부인회'를 통한 조직적인 국정 관여였다. 그는 여성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이 거대 조직의 총재를 맡아 사실상의 세금을 징수하며 국가 속의 국가를 운영했다. 당시 언론들은 부인회 회비가 국민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반공식적인 세금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 대한부인회는 여성 권익 향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대통령 추대 대회나 개헌 지지 분위기 조성의 선봉에는 항상 프란체스카의 부인회가 있었다.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흐름을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는 비서진에게 정계의 어두운 소식이나 불쾌한 진실은 보고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대통령을 침묵의 벽 속에 가두었다. 남편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민심 이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정보가 차단된 노령의 대통령 뒤에서 프란체스카는 국정의 절반을 좌지우지하며 제1공화국의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역사학계 일각에서는 프란체스카를 4·19 혁명을 촉발한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으로 지목한다. 제1공화국의 실질적인 투톱이 이승만-이기붕이 아니라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였다는 분석은 당시의 폭정이 영부인들의 권력욕과 맞닿아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미뤄진 것은 이후 이어진 군부 독재 정권들이 이승만의 향수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4·19 혁명의 정신이 온전히 계승되었다면, 프란체스카는 건국 초기의 혼란을 가중시킨 '경국지색'의 전형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결국 프란체스카는 후대의 영부인 리스크를 예견한 원형과도 같은 인물이다. 독자적인 조직을 거느리고 남편의 장기 집권을 보조하며 인사권을 전횡했다는 점에서 그는 현대사의 그 어떤 영부인보다도 국정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승만 정권의 모순과 실패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부인이라는 그늘 뒤에 숨어 권력을 행사했던 프란체스카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초대 영부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단순히 과거를 들추는 작업이 아니라, 오늘날 반복되는 영부인 잔혹사를 끊어내기 위한 필수적인 성찰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