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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데스 결승전 난동, 4년 전 악습 반복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의 마침표는 환희가 아닌 추태로 얼룩졌다.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 레안드로 파레데스가 경기 종료 직후 상대 선수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국제축구연맹(FIFA)의 강력한 사후 징계 직격탄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준우승에 그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라운드 위에서 동료 의식을 저버린 그의 행동에 대해 현지 매체들은 단순한 출장 정지를 넘어선 중징계가 내려질 것이라는 관측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사건은 미국 뉴저지 스타디움에서 열린 스페인과의 결승전 종료 휘슬이 울린 직후 발생했다. 0대 1 패배로 우승컵을 놓친 파레데스는 곧장 스페인의 에릭 가르시아에게 달려가 거칠게 밀치며 목을 움켜쥐는 난폭한 행동을 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옆에 있던 가비를 바닥으로 내팽개친 뒤 얼굴을 밀치고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까지 하며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주심은 지체 없이 레드카드를 꺼내 들었고, 파레데스는 월드컵 결승전 역사상 일곱 번째 퇴장 선수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양 팀 선수단과 코칭스태프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자 축구계 인사들의 비판도 쏟아졌다. 잉글랜드의 전설 앨런 시어러는 패배에도 품격이 있어야 한다며 파레데스의 행동을 끔찍한 범죄 수준으로 규정했다. 현장에서 경기를 지켜본 세르히오 라모스 역시 믿기 힘든 광경이라며 혀를 내둘렀고, 국제 무대에서 영구적으로 퇴출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전 세계 축구 팬들 또한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그의 비이성적인 폭력을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파레데스의 이러한 돌출 행동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은 징계 수위를 높이는 결정적 요인이 될 전망이다. 그는 4년 전 카타르 월드컵 8강 네덜란드전에서도 상대 벤치를 향해 공을 강하게 차 날려 대규모 난투극을 유발한 전력이 있다. 당시에는 경고 한 장으로 위기를 넘겼으나, 이번에는 결승전이라는 상징적인 무대에서 직접적인 신체 가해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가중 처벌이 불가피해 보인다. FIFA 규정에 따르면 난폭한 행위는 최소 3경기 이상의 정지가 가능하지만,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더 긴 기간이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현재 FIFA 징계위원회는 경기 보고서와 중계 영상을 토대로 정밀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스칼로니 감독을 비롯한 팀원들이 사태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우승팀 스페인 선수들은 부상을 입은 가르시아와 가비의 상태를 점검하며 파레데스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축구의 가치를 훼손한 이번 사태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아르헨티나 축구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번지고 있다.

 

월드컵의 대미를 장식해야 할 시상식은 파레데스의 난동으로 인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승자를 축하하고 패자를 위로해야 할 축제의 장이 폭력으로 오염되면서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FIFA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향후 국제 경기에서의 폭력 행위에 대한 기준이 재정립될 것으로 보인다. 파레데스는 이제 그라운드가 아닌 징계위원회 심판대 위에서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순자·김건희 능가한 초대 영부인

 대한민국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동안 이순자나 김건희 등 후대 영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국적 배경과 친인척 비리에서 자유로웠던 환경 덕분에 검소하고 헌신적인 내조자의 이미지가 강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과 비화들을 심층 분석해 보면, 프란체스카는 단순한 내조자를 넘어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한 '소통령'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남편인 이승만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인사권을 전횡하며 제1공화국의 몰락을 부추긴 실질적인 권력의 한 축이었다.프란체스카의 권력 행사는 남편의 인사권을 가로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비서를 좌천시키거나 장관에게 직접 인사를 통보하는 등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서슴지 않고 침범했다. 당시 외신들은 정부 관리들이 실력보다는 영부인에 대한 개인적 호의 덕분에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도 묵인하거나 오히려 비서진에게 이해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영부인이 경무대 내부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며 공적 시스템을 사유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인사 개입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프란체스카가 직접 장악한 '대한부인회'를 통한 조직적인 국정 관여였다. 그는 여성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이 거대 조직의 총재를 맡아 사실상의 세금을 징수하며 국가 속의 국가를 운영했다. 당시 언론들은 부인회 회비가 국민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반공식적인 세금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 대한부인회는 여성 권익 향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대통령 추대 대회나 개헌 지지 분위기 조성의 선봉에는 항상 프란체스카의 부인회가 있었다.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흐름을 철저히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는 비서진에게 정계의 어두운 소식이나 불쾌한 진실은 보고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대통령을 침묵의 벽 속에 가두었다. 남편의 건강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민심 이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정보가 차단된 노령의 대통령 뒤에서 프란체스카는 국정의 절반을 좌지우지하며 제1공화국의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다.역사학계 일각에서는 프란체스카를 4·19 혁명을 촉발한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으로 지목한다. 제1공화국의 실질적인 투톱이 이승만-이기붕이 아니라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였다는 분석은 당시의 폭정이 영부인들의 권력욕과 맞닿아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미뤄진 것은 이후 이어진 군부 독재 정권들이 이승만의 향수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4·19 혁명의 정신이 온전히 계승되었다면, 프란체스카는 건국 초기의 혼란을 가중시킨 '경국지색'의 전형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결국 프란체스카는 후대의 영부인 리스크를 예견한 원형과도 같은 인물이다. 독자적인 조직을 거느리고 남편의 장기 집권을 보조하며 인사권을 전횡했다는 점에서 그는 현대사의 그 어떤 영부인보다도 국정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승만 정권의 모순과 실패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부인이라는 그늘 뒤에 숨어 권력을 행사했던 프란체스카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초대 영부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단순히 과거를 들추는 작업이 아니라, 오늘날 반복되는 영부인 잔혹사를 끊어내기 위한 필수적인 성찰의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