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배럴당 128달러? 기름값, 우크라 전쟁 때로 돌아간다

 미국 석유업계의 수장들이 국제유가 급등 사태와 관련해 백악관을 직접 찾아가 "앞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할 것"이라며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강력히 촉구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지정학적 위기가 초래한 이번 사태에 대해, 행정부가 내놓은 미봉책만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업계의 절박한 경고가 터져 나온 것이다.

 

엑슨모빌, 셰브론, 코노코필립스 등 미국을 대표하는 석유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지난 11일 백악관에서 에너지부 및 내무부 장관과 회동을 가졌다. 이들은 투기 세력까지 가세할 경우 유가가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치솟고, 최악의 경우 원유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며 정부의 안일한 인식을 질타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비축유 방출, 러시아 및 베네수엘라산 원유 제재 완화 검토 등 단기적인 조치들을 내놓은 상태다. 하지만 CEO들은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리지 않는 한, 이러한 대책들은 시장의 불안을 잠재울 수 없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실제로 시장은 행정부의 대책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 국제유가는 이미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으며, 미국의 이란 석유 시설 공격 등 군사적 긴장이 고조될수록 가격은 더욱 요동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유가 상승으로 미국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자, 업계는 단기 수익보다 장기적인 산업 붕괴와 경제 충격이 더 클 것이라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월스트리트의 시각도 석유업계와 다르지 않다. 주요 투자은행들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지속되고 군사적 충돌이 격화될 경우 유가가 현재 수준을 넘어 훨씬 더 높이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단기적으로는 유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수준인 배럴당 128달러를 넘을 수 있다는 구체적인 예측까지 나왔다.

 

나아가 시장에서는 이번 사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유가가 배럴당 147달러까지 치솟았던 악몽을 재현할 수 있다는 극도의 공포감마저 확산하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인 호르무즈 해협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고유가 쇼크가 세계 경제 전체를 뒤흔들 것이라는 비관론이 힘을 얻고 있다.

 

나프타 가격 80% 폭등, 국내 산업 덮친 연쇄 위기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이 한국의 산업 현장을 멈춰 세우는 ‘도미노 현상’을 촉발하고 있다. 원유 수송로가 막히면서 시작된 공급망의 균열은 석유화학 업계를 거쳐 우리 생활과 밀접한 최종 소비재 생산 라인까지 위협하는 연쇄적인 충격으로 번지고 있다.문제의 시작은 원유를 정제해 얻는 기초 원료 ‘나프타’의 공급 차질이다. 중동에서의 원유 수입이 막히자 국내 나프타 재고가 바닥을 드러냈고, 가격은 불과 한 달여 만에 80% 가까이 폭등했다. 이는 석유화학 산업의 핵심 소재인 폴리에틸렌 생산에 직격탄이 되었고,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수많은 중소기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경기도의 한 산업용 포장 비닐 생산업체는 이러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다. 포스코, 현대 등 대기업에 금속 표면 보호용 필름 등을 납품하는 이 공장의 가동률은 원료 부족으로 인해 평소의 80% 수준까지 떨어졌다. 활기차게 돌아가던 기계 소리가 잦아들면서 공장 전체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원료 부족 사태는 업계 내에 ‘원료 배급’이라는 기현상까지 낳았다. 원료를 공급하는 대기업들이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거래처에 우선적으로 물량을 몰아주면서, 영세한 업체들은 돈이 있어도 원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결국 대형 업체마저 소규모 거래처에 납품을 중단하며 연쇄적인 피해가 확산되는 중이다.이러한 생산 차질은 공장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으로 직결된다. 현재 재고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남짓. 5월 이후에도 사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장 가동 전면 중단이 불가피하며, 30여 명의 생산직 근로자들은 무급 휴직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결국 포장재가 없어 완제품을 출하하지 못하는 ‘물류 대란’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이번 사태는 중동 원유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한국 산업 전체를 얼마나 취약하게 만드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근본적인 수입선 다변화 대책 마련이 시급함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