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뜯어내고 메우고” 단색화 전설 정상화 화백 하늘로

똑같은 행위를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반복하며 캔버스 위에 인고의 시간을 새겨 넣었던 시대의 거장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 단색화의 세계화를 이끈 거목 정상화 화백이 28일 오전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아흔이 넘은 고령의 나이에도 조수 한 명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두 손으로 노동의 가치를 증명해 왔던 그는 예술이란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노력한 만큼 나타나는 정직한 결과물임을 평생에 걸쳐 보여주었다.

 

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정상화 화백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 전위미술의 1세대로서 화려한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형식을 파괴하는 앵포르멜 경향의 작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혔다. 이후 그는 1969년부터 1992년까지 일본 고베와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인 격자형 추상회화를 정립했다. 1992년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경기도 여주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오로지 창작에만 매진하는 구도자적인 삶을 살았다. 

 

정상화 화백의 작품은 언뜻 보면 단순한 평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이 숨어 있다. 1980년 공항 세관원이 그의 작품을 보고 그림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정도로 그의 화풍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두고 벽지 같다며 조롱하기도 했으나, 거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의 캔버스에는 실핏줄 같은 격자무늬 사이로 수십 가지의 색이 겹겹이 쌓여 오묘한 깊이감을 자아낸다. 이것은 오직 인내와 투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적 경지였다.

 

그의 작업 방식은 예술을 넘어 수행에 가깝다. 캔버스 전체에 고령토를 두껍게 바른 뒤 이것이 완전히 마르면 캔버스를 접어 화면에 미세한 균열을 낸다. 그리고 그 틈새로 고령토를 하나하나 뜯어내고 그 빈자리에 다시 아크릴 물감을 채워 넣는다. 이 과정을 메우고 뜯어내며 수없이 반복하는 행위는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를 상징한다. 동료 화가 이우환은 세계 어디를 다녀도 이토록 지독한 장인 정신을 가진 작가는 본 적이 없다며 그의 집요한 작업 정신에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거장이 남긴 유산은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리움미술관을 비롯해 미국 스미스소니언 허쉬혼 미술관, 홍콩 엠플러스 미술관, 그리고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이 그의 작품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은 그의 평생 업적을 기리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으며, 한국 단색화가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철학적 사조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생전의 그는 사람이 사는 것도 결국 반복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바보스러울 정도로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며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가장 확실한 단어라는 것이다. 갤러리현대는 그가 구축한 화면이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노동의 시간이 투영된 무한의 공간이라고 평가하며 고인을 애도했다. 비록 육신은 떠났으나 그가 캔버스 위에 꾹꾹 눌러 담은 시간의 흔적들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노력의 소중함과 인생의 의미를 일깨워줄 것이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캔버스 앞에서 한 번도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 정상화. 그는 이제 그토록 사랑했던 고령토와 물감을 뒤로하고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박서보, 윤형근 등과 함께 한국 단색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그들의 시대가 한 페이지씩 넘어가고 있지만, 거장이 남긴 격자무늬 사이의 빛나는 색채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딱 1승 남았다! 韓 컬링 4강 정조준

대한민국 여자 컬링 대표팀이 다시 한번 전 국민의 심장을 뛰게 하고 있다. 4강 플레이오프 진출까지 이제 단 한 걸음만이 남은 상황이다. 우리 대표팀은 19일 오후 10시 5분 이탈리아 코르티나 컬링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숙적 캐나다와 2026년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라운드로빈 최종전을 치른다. 이번 경기는 준결승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자 자력 진출을 결정지을 수 있는 분수령이다.지난 12일부터 시작된 대표팀의 여정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첫 경기에서 미국을 상대로 4대8 역전패를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곧바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개최국 이탈리아를 7대2로 완파하고 종가 영국을 9대3으로 제압하며 기세를 올렸다. 덴마크와의 4차전에서 3대6으로 패하며 잠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가장 중요한 승부처였던 한일전에서 7대5 승리를 거두며 반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후 중국을 10대9로 낚으며 연승을 이어갔고 세계 최강 스위스의 벽에 막혀 아쉬움을 삼켰으나 직전 경기인 스웨덴전에서 8대3 대승을 거두며 4강 진출의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현재 한국은 5승 3패를 기록하며 캐나다, 미국과 함께 공동 3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미 7승 2패를 기록한 스웨덴이 1위로 4강행을 확정 지었고 6승 2패의 스위스가 그 뒤를 잇고 있다. 탈락이 확정된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남은 두 자리를 놓고 한국과 캐나다, 미국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영국이 사투를 벌이는 모양새다. 경우의 수는 명확하다. 한국이 이번 캐나다전에서 승리하면 다른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자력으로 준결승에 진출한다. 만약 패배할 경우에는 타 팀의 경기 결과와 상대 전적을 따져야 하는데 미국에 상대 전적이 밀리는 상황이라 승리가 절실하다.이번 대표팀은 실력은 물론 수려한 외모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벌써부터 온라인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스킵 김은지를 필두로 서드 김민지, 세컨드 김수지, 리드 설예은, 핍스 설예지로 구성된 이른바 5G 군단은 컬링계의 아이돌로 불리며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매 경기 신들린 투구로 시청자들에게 쾌감을 선사하고 있는 김민지는 팬들 사이에서 도파 민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SNS 바이럴의 중심에 섰다.김민지는 스웨덴전 승리 직후 진행된 인터뷰에서 자신감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오늘 경기를 통해 그 기운을 제대로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내일 열릴 캐나다전에서도 이 흐름을 그대로 이어가 좋은 성적을 내겠다며 밝은 미소를 보였다. 스킵 김은지 역시 캐나다전에서도 국민들이 많이 응원해 주신다면 오늘처럼 시원한 대승을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선수들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현장의 열기도 뜨겁다. 특히 김민지의 부모님은 이탈리아 현지에서 딸을 응원하며 귀국 항공편을 아예 결승전 이후 날짜로 예약해 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훈훈함을 더했다. 결승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딸의 다짐에 동료 선수들 역시 가야 한다며 한목소리로 화답하는 모습은 팀의 단단한 결속력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2018년 평창 대회에서 전국을 영미 열풍으로 몰아넣었던 팀 킴의 은메달 신화 이후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메달 기회에 팬들의 기대감도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컬링 여자 4인조 경기는 10개 팀이 풀리그를 치른 뒤 상위 4개 팀이 토너먼트에 진출하는 방식이다. 예선 순위에 따라 1위와 4위, 2위와 3위가 맞붙어 결승행을 다툰다. 한국이 캐나다를 꺾고 기세를 올린다면 8년 만의 포디움 입성은 물론 금빛 사냥까지 충분히 노려볼 수 있는 전력이라는 평가다. 만약 한국 여자 컬링이 결승에 진출하게 된다면 그 역사적인 피날레 무대는 대회 마지막 날인 22일 펼쳐지게 된다.오늘 밤 펼쳐질 캐나다와의 최종전은 단순한 예선 경기를 넘어 대한민국 컬링의 저력을 다시 한번 세계에 알리는 무대가 될 전망이다. 빙판 위의 체스라 불리는 컬링의 묘미와 선수들의 간절함이 더해진 이번 경기에 전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5G 선수들이 보여줄 마지막 스톤의 궤적이 과연 4강행이라는 과녁을 꿰뚫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