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남인의 심장'에 꽂은 노론의 깃발…'상주 흥암서원'에 얽힌 역사 드라마

 조선 후기 영남 지역에 세워진 대표적인 서인(西人) 노론(老論)계 서원인 '상주 흥암서원'이 그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새롭게 지정되었다. 국가유산청은 11일, 경상북도 상주시에 위치한 흥암서원이 조선 후기 정치사와 건축사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을 고려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흥암서원은 본래 조선 후기 남인(南人) 세력의 중심지였던 영남 땅에, 그들과 대척점에 있던 서인 노론계의 정신적 지주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을 모시기 위해 건립된 공간이다. 1702년 창건되어 1705년 임금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는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고종 대 서원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고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흥암서원이 남인의 본거지인 상주에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인물 간의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있다. 송준길은 율곡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을 계승한 대학자로, 우암 송시열과 함께 서인 노론 세력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상주 출신의 대학자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되면서 약 10년간 상주에 머물렀고, 이 기간 동안 지역 유림들과 깊은 학문적, 인간적 교류를 나누었다. 훗날 그의 사후에 상주 유림들이 서인 노론 중앙 정계의 후원을 받아 그를 모시는 서원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지역적 연고가 결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흥암서원이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중앙 정치 세력과 지방 사림 세력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흥암서원의 가치는 건물 배치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서원의 공간 구성은 크게 전면의 강학 공간과 후면의 제향 공간으로 나뉘는데, 강학 공간의 배치가 매우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서재와 동재가 강당 앞에 위치하는 영남 지역 서원의 보편적인 형식과 달리, 흥암서원은 강당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편으로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이는 송준길이 속했던 기호학파 계열 서원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식으로, 영남의 땅에 기호학파의 건축 양식을 적용한 일종의 '절충형 서원'인 셈이다. 이는 당시 학파 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과 정체성 드러내기가 건축 양식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며, 사당인 흥암사에는 1705년 숙종이 직접 하사한 현판과 1716년에 쓴 해서체 글씨가 그대로 남아있어 그 가치를 더한다.

 

국가유산청은 흥암서원이 조선 후기 영남 지역 내 서인 노론 세력의 분포와 인적 구성, 서원의 운영 방식과 사회·경제적 기반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품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매년 봄과 가을에 송준길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제사인 '춘추향사'가 창건 이래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단순한 유적을 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역사적 공간임을 증명한다. 이처럼 흥암서원은 인물, 건축, 학술적 가치를 온전히 보존하며 현재까지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다.

 

 

 

럭비 국대 윤태일, 4명 살리고 떠난 그의 마지막 경기

 럭비 국가대표 출신 윤태일 씨가 불의의 사고로 뇌사 상태에 빠진 뒤 4명의 환자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라운드를 뜨겁게 누볐던 그의 심장은 이제 다른 이의 몸에서 계속 뛰게 됐다.지난 8일, 윤 씨는 퇴근길에 불법 유턴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평소 장기기증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밝혀왔던 고인의 뜻을 존중해 가족들은 기증에 동의했다. "뛰는 것을 좋아했던 고인만큼 누군가 운동장을 달려주길 바란다"는 마음이었다.경북 영주 출신인 고인은 럭비 선수였던 형을 동경해 중학교 시절 처음 럭비공을 잡았다. 이후 연세대학교 럭비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로 발탁되었고, 2010년 광저우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2회 연속 동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이뤘다.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에는 체육발전유공자 체육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소속팀이었던 삼성중공업 럭비단 해체 후에는 회사에 남아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럭비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그의 삶은 럭비와 가족,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 특히 재능기부의 일환으로 10년 넘게 한국해양대학교 럭비부 코치로 활동하며 후배 양성에 힘썼다. 자신의 연차를 모두 모아 선수들의 합숙 훈련에 동행하고, 선진 럭비를 배우기 위해 1년 넘게 일본어를 공부할 정도로 럭비에 진심이었다.고인의 아내 김미진 씨는 "마지막 모습까지 멋있고 대단한 사람이었다"며 "가족으로 함께 한 모든 순간이 고마웠다. 우리가 사랑으로 키운 딸은 걱정 말고 하늘에서 편히 잘 지내길 바란다"는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