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를 '슬픈 전설'이라 칭했던 화가, 천경자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 그의 예술 세계를 총망라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가 서울미술관에서 막을 올렸다.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이번 특별기획전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그의 채색화 8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는 2006년 생애 마지막 전시 이후 약 20년 만에 성사된 대규모 회고전으로, 그의 대표작들은 물론, 직접 쓴 저서와 작업 과정이 담긴 사진, 편지 등 방대한 아카이브를 통해 인간 천경자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전시의 중심에는 단연 그의 상징과도 같은 여성 인물화들이 자리한다. 천경자의 여성들은 단순한 초상의 모델을 넘어, 주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강인한 존재로 그려진다. 대표작 '고(孤)'(1974) 속 '머리에 꽃을 얹은 여인'은 작가의 페르소나 그 자체다. 슬픔과 고독이 서린 깊은 눈빛을 하고 있지만, 이는 타의에 의한 외로움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온전히 마주하는 순간의 환희를 담고 있다. 근대 여성 시인 노천명을 그린 초상화(1973) 역시 천경자의 영원한 주제인 '꽃과 여인'을 통해 한 인물의 감수성과 사상을 응축해 보여주는 걸작이다.

천경자의 예술 세계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낙원을 찾아 25년간 13차례에 걸쳐 전 세계를 누빈 모험가였다. 이번 전시는 '베니스 산 마르코 사원'(1972), '케냐, 춤'(1974) 등 그의 여정 속에서 탄생한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들을 생생하게 소개하며, 당시의 사진 기록과 함께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만든다. 심지어 1972년에는 정부 파견 작가로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을 찾아 파병 군인들의 활약상을 기록화로 남기는 등, 시대의 부름에도 기꺼이 응답했던 예술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의 나이만큼 삶이라는 책의 페이지가 넘어간다고 믿었던 그는 91페이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이번 전시는 '101페이지'라는 이름으로 그의 전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선언한다.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이 "세월이 지우려 해도 존중받아 마땅할 예술인"으로 그를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듯, 이번 전시는 시대를 앞서간 한 여성 예술가의 치열했던 삶과 그가 남긴 위대한 예술적 유산을 온전히 마주하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